마가복음2020. 4. 8. 08:51

말씀: 

1)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온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나 그를 칠 증거를 얻지 못했다. 거짓증거를 하되 성전을 헐고 3일동안 지으리라하는 말로 서로 논쟁을 벌였다. 

2) 침묵하시는 예수님, 결국에는 찬송받을 이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니,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조롱하였다.

3) 여종이 베드로에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알지 못한다고 세번을 부인하니 닭이 두번 울었다.

함께 있었다. -->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몰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그 도당이다 --> 부인함

참으로 그 도당이다. --> 저주하며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묵상: 

1) 예수님을 잡아오기는 했으나, 덮어씌울 적당한 죄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끼리도 설왕설래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세상에서 잘못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저것 많은 죄를 지고 잡혀왔다면 온갖 목록을 들이대며 고소하였을텐데, 잡아온 당사자들조차도 무슨 죄인지 몰라 헤매었으니, 예수님의 결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예수님은 일일히 댓구하지 않으셨다. 대의를 중시하고 지금 십자가를 지어야만 하는 마당에 변호를 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표정은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여유였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을 꼬투리 잡아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모습으로 잡혀온 이 청년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높히니 바로 이거다라고 하면서 죽임을 당하게할 결정적인 죄목으로 정하게 된다. 

3) 베드로는 예수님이 받는 재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멀찍이 따라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불을쪼고 있었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세번씩이나 그 당이라고 다그쳤지만 끝끝내 아니라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달ㄲ이 두번 울고 말았다.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퍼뜩 떠오르면서 베드로의 정신이 확 들었을 것이다. 심문을 받으시면서 저 멀찌감치 앉아있던 베드로와 당신을 부인하며 여종에게 능욕당하는 제자의 모습과 닭울음소리. 베드로는 민망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적용: 

나는 세상에 대해 변명하는가? 때로는 예수님 믿는 일로 오해를 받고 다른 사람을 비난을 받아도 그것이 주를 위한 일이며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면 내가 받을 부끄러움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는가? 사람들이 하는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내 속사람을 정확히 아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을 바라보자. 주님은 내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손해보는 삶을 살자. 이것이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길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주님이 영광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말도 안되는 심문을 받으시면서 대의를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단 한마의의 중요한 말만을 하셨다. 

베드로는 주의 수제자이나, 여전히 다혈질이고 연약한 존재였다. 그런 베드로의 모습이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은혜다. 나도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약삭빠르며 이타적이지 못하고 이중적이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세상에 빛을 비추기는 커녕 제 앞가름도 제대로 못하는 나이기에 더욱 소망을 가져본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며 저도 세번씩이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보다 훨씬 모자란 제자이니 주의 도우심을 구하자. 어찌 주님 도움없이 이 하루를 살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위기와 위험 속에서도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오늘 수술 가운데 함께 해주시고 장루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분을 위한 지혜를 구하자.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4. 7. 08:04

말씀: 

1)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보낸 무리와 함께 유다가 와서 입을 맞추는 분이 예수님이니 잡아 끌어가라고 함.

2) 그들이 예수님을 잡을 때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칼로 떨어뜨렸다. 예수님은 날마다 함께 성전에 머물렀는데 잡지아니하여놓고서는 이제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잡으러 온 이유가 무엇이냐하고 하시면서 성경을 이루신다고 하심.

3) 제자들은 벗은 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묵상: 

1)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팔아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는가? 하지만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니,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하다. 이 유다는 우리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악한 탐욕이 죄를 우리 안에 키우고 있다. 

2,3) 검과 몽치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의연하셨다. 평소 사역 때에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셨지만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다만 성경을 이루려고 이 모든 상황에 순응하셨다. 베드로의 급작스러운 행동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나나내준다. 그 딴에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수제자로서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 직후에 제자들이 모인 행동은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뿐이었다. 예수님이 잡히시게 되면서  민란을 일으키려는 자의 공범으로서 죄를 물을 것이 두려워 도망갔을 것이다. 바로 전에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놓고 이런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의 힘을 빌려 그 자리를 모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씀을 이루려고 순한 양같이 끝려가셨다. 불법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저항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고 비방하였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의연함에 놀라며 과연 이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적용:

예수님의 참 제자와 배반한 제자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이나 겉옷을 버려두고 알몸으로 모두 도망간 것이나 뭐가 다른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유다를 비방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충성된 제자의 모습은 허울에 불과하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유다의 모습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 제자들의 모습이 연약한 나의 모습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어떻게 돌변할지 우리도 모른다. 자신도 놀랄 이런 모습에 다시 회개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고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님의 의연함을 배우자. 그분이 폭력에 대처하는 모습의 당위성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할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는 되겠는가? 가장 최악의 경우가 죽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죽은 이후의 삶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면 그들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의 악과 폭력에 대하여 말씀 안에 거하여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담대하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이시며 나를 돕고 계심을 잊지 말자. 예수님의 현명한 행동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다.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은 다만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4. 6. 09:31

말씀: 

1) 겟세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머물라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고, 이때 예수님의 마음 상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2) 기도하고 돌아오시니 제자들이 자고 있었고,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냐고 말씀하시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은 이제 잡혀갈 시간이 다 되었고, 인간적 연약함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셨다. 얼마나 그 두려움이 컸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잔을 물리쳐주시길 기도했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셨지만, 육신을 갖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겪을 가장 큰 고통을 미리 아시고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아버지를 부르는 그 간절한 기도 속에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그 고난이 얼만 큰 것일지를 가늠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큰 진노를 기억하며 큰 고통 가운데 신음하였지만,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은 잊지 않으셨다. 

2) 제자들은 심히 피곤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겪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여느 때와 비슷하게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자신들은 선생님이 왜 안 오시나 하면서 졸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당부를 못 지킨 제자들의 큰 문제는 공감의 부족이었다고 본다. 얼마나 중차대한 일이 곧 일어날 것인데, 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졸리면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가진 제자들이었지만, 이에 주님의 능력이 더해질 때 위대한 사역자로 거듭날 수 있다. 

 

적용: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떠올리면 고통스럽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의 짐이었던지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내뱉는 주님의 절규를 듣자면, 한없이 숙연해진다. 이번 주 시작되는 고난주간 동안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드렸던 예수님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기만 하면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 일은 우리는 흉내조차 못 낼 것들이다. 그 대가가 얼마나 컸던지 그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깨닫는다면 어찌 전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신음하듯 고통스러워했던 주님의 기도 장소를 숙연하게 지켜보는 하루가 되길 빌어본다. 

제자들의 연약함이 도리어 은혜다. 강한 용사가 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제자로서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의 연약함이나 제자들의 연약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강한 주의 군사로 거듭나기를 힘쓰자.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것이 이루졌다는 고백을 드려야 할 것이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