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020. 4. 5. 13:52

말씀: 

1)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며 그것이 예수님의 몸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찬식을 하셨다. 

2) 감람산으로 가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임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묵상: 

1)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 성내에 들어가셔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셨다. 평소와 같이 떡을 떼고 잔을 나누셨는데, 이번에는 이 떡과 잔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셨다.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 하셨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다. 몸을 먹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부를 몸안에 들어오게 한 것이고 이 떡이 소화가 되어 명양분이 몸에 남아 자신들의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 이 떡을 먹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잔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새것으로 다시 마실 것을 약속하셨다. 

2)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그날 밤 닭이 두 번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극구 부인하면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가 분명 예수님을 버릴 텐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을 것이다. 

 

적용: 

예수님께서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로 예수님의 일부가 되게 하신 일이 감사하다.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 결합은 단지 사상의 동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통해 매번 이루어지는 성찬식을 통해 그를 기념하고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되었음을 세상에 대하여 선포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흘리신 피가 그를 믿는 자마다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베드로의 고백은 누가 보아도 충성된 제자의 본연된 모습이었으나, 베드로는 후에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얼마나 많이 깨닫고 겸허 해졌겠는가? 나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한 커다란 위험이 닥쳤을 때 어떤 모습을 취할 것인가 궁금하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하면서 생을 마감할 자신이 있는가? 한번 죽는 것이니 그 죽음으로 단 한 명이라도 생명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값진 죽음이 될 것이다. 기도하기를 살아있는 동안에 목숨을 걸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소겸
설교2020. 4. 5. 13:00

본문: 벧전 4:1~2

벧전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1. 고난은 회개와 개혁의 능력이다.

1절,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고 받아야 한다. 코로나의 전염력, 죄의 전염력,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죄도 이와 같다. 누군가의 죄과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된다. 

이러할 때 해야 할 질문,

나 자신에 대해: 1) 내가 매일 죄를 생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생산하고 있는가?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죄를 생산할 때가 많다. 온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내가 될 수 있다. 

2) 나는 하나님보다 하나님 아닌 것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가? 내 목숨을 무엇을 위해 투자하고 있는가? 

내 재능, 생명을 무엇을 위해 드리고 있는가? 

교회에 대하여  1)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인가?  신사 참배 - 제1계명을 거스른 무선운 죄악이었다. 5년 후 1945년 모든 한국 교회가 일본에 의해 강제 폐쇄되는 일이 있었다. 교회가 폐쇄되는 이런 상황을 볼 때 한국의 교회들이 세속주의, 율법주의, 권위주의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가난한 마음이 있는가? 뜨겁게 예배했던 가난한 마음이 한국 교회 안에 있는가? 눈물의 기도가 우리에게 있는가? 새벽에 때마다 눈물로 기도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가? 

세상을 향해 1) 공산주의, 무신론자, 과학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이런 세상의 모습을 보면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가지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조 라이트,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말씀을 업신여기고, 성적 타락, 가난한 사람의 것을 뺏은 우리의 모습. 

상원의원들이 퇴장하며 비판하였다고 한다. 이 기도문이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나아가고 있다. 

코로나 재앙 가운데,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질문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교만한 인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아라.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일 수 있다. 

삼하24: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삼하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기도하고 찾으면 그 땅을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말씀이다. 

2절: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다. 죽기 전까지의 삶을, 

고난이 닥쳐올 때 죄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살아야 한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들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다.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준다고 한다. 이 세상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모든 죄는 코로나 이전으로 족하다.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말씀을 받고 깨달았으니 말씀에 순종하며 살 것이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마음에 뿌림(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깨끗하여진 것을 연상케 한다), 맑은 물로 씻음.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몸이 씻어진 것처럼 마음도 씻어야 한다. 손만 열심히 씻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도 씻어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성 베드로 성당, 타락의 결과, 면죄부를 판매하여 착취하여, 바로 그때 마틴 루터 등을 통해 흑사병의 배경, 종교 개혁을 이루셨다. 바로 이때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는 때가 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릴 텐데,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 인생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들 드리도록 하자.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영적 예배를 드리자. 

코로나로 인해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고백하는 기회가 되게 해야겠다. 고난은 개혁을 이룬다. 

 

2. 고난은 사랑과 복음 증거의 능력이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해주는 능력이다. 부부가 많이 다퉜는데, 암에 걸린 아내, 그 남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험한 말,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고 사랑을 회복, 아내를 살려주신 하나님. 이 고난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버스 안에서 아이가 계속 울었다. 사람들이 애좀 달래 보아요. 비난을 퍼부었다. 아줌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안 했는데, 기사가 차를 세우고 막대사탕을 사다 주니 애가 울음이 그쳤다. 청각장애인 엄마였다. 기사는 모자가 내릴 때 헤드라이트로 그 가는 길을 비춰줬다. 이 아이의 엄마의 고난을 깨닫고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과 긍휼이 생겼다. 

나의 고난이든 타인의 고난이든 사랑을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처 받는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고난은 복음 증거의 능력: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몸에 불끈 쥔 주먹으로 못을 박았다. 편 손으로 그 못을 받아들였다. 이 땅의 비극은 불끈 쥔 주먹 때문에 일어난다. 내 것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편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쥔손에서 편손으로 바뀌어야 한다. 남을 섬기기 위해서... 복음은 움켜줘서는 안되고 펴서 나누어야 한다. 이때 백배 천배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제 손을 펴자.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을 모르던 분들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으니 불신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 진다고 한다. 구원에 목마른 뭇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라. 

 

3. 고난은 기쁨과 영광의 능력이다.

짐 윌리스: 십자가는 고통과 고뇌의 자리인 동시에 기쁨과 감사의 자리이다. 

그 너머의 부활을 영광을 바라보시고 그 고난을 이겨내셨다. 코로나 재앙도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리빙스톤: 섬기고 사랑하면 마음의 평강과 천국의 영광이 주어지는데 섬김이 왜 희생이냐. 기쁨이요 영광이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자. 고통의 자리이지만,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는 통로이다. 

 

결론: 

고통당하는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고난의 능력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교회와 세상이 회개하고 개혁될 기회를 주셨다. 사랑과 복음증거의 기회가 될 것이다. 기쁨과 영광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1) 기억에 남는 말씀: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길 바라며 개인과 교회와 세상이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이제까지 죄 가운데 누렸던 것을 기꺼이 다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2) 은혜받은 말씀: 

고난받는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용납하고 섬기는 일로 나아가야 할것.

3) 삶으로 실천할 말씀: 

코로나 사태를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주셨나를 다시 한번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보자. 지금의 고난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열매를 맺게해주시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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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4. 4. 12:25

말씀:

1) 제자들이 유월절에 먹을 음식과 장소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여쭈니 물 한 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한 다락방을 안내받으라 하셨고, 그들은 말씀대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

2) 먹을 때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하셨고,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이 유월절을 보낼 다락방을 준비하신 내막이 이럴 것이다.

유월절이 되기 며칠전에 성내로 들어가 적당한 다락방을 발견하시고, 그 주인에게

'혹시 우리가 이 곳에서 유월절을 보낼 수가 있겠소?'

하고 물으니 그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

'기꺼이 내어드릴테니 사용하세요'

예수님께서 

'무교절의 첫날(목요일) 아무 때에 내가 제자 둘을 보낼 텐데 안내를 해주시오'

라고 말씀하시니 그 주인이 대답하기를

'아 그때라면 우리집 하인이 동문 근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시간이니 물동이 하나를 진 남자 하인을 발견하면 따라가라고 해주세요. 집에 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시에 제자 둘을 보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장소를 안내받고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하셨다. 

또 하나의 가정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 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내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텐데 그를 따라가라. 그 집에 이르거든 집주인에게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냐고 물어라. 그리하면 큰 다락방을 보여줄 텐데 거기서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

이에 제자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나는 후자를 더 신뢰한다. 왜냐하면 물을 길러온 하인이 딱 한 사람만 있었을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집이 어디인 줄 미리 아셨다면 그 집의 위치를 알려주시면서 '미리 부탁해두었으니 그 집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라'라고 하셨을 텐데, 물동이를 진 사람을 따라가라는 것은 확률적으로 엉뚱한 집을 찾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운 예수님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 때에 나귀를 데려오는 과정도 비슷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수소문해 그 집을 찾아가서 나귀의 상태를 확인하고 '모일 모시에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쓰려고 하니, 제자들을 보내주면 잠시 나귀를 빌려주세요.'라고 미리 준비를 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의 철저한 준비성인가 아니면 초자연적 전지능인가? 

2) 예수님께서 처음 가룟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셨을 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말씀에는 누가 자신을 배반하여 팔아넘길 것인지를 안다고 하셨다. 유다가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결심을 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협조하겠다고 말한 이후에 이 사실을 예수님이 인지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은 마음을 읽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가룟유다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알아차리셨나 하면서 마음이 뜨끔했을 것이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유다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적용: 

유월절은 성내에서 보내야한다는 전통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서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그 배후에는 예수님의 완벽한 전지성 또는 준비성이 있었고, 이에 따른 제자들의 순종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자인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매번 경이로움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 되는 요구인 것 같아도 따라 순종하면 나중에 그 내막을 이해하게 된다. 맹목적인 순종이 지식으로 이해하는 순종보다 낫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인 태도이며 가장 상식적으로 사는 삶의 극치가 될 것이다. 

유다에게 주어진 또한번의 회개의 기회가 지금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주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는 명확한 언급이 주어졌고 누구라도 자신이 그 사람임이 밝혀질 찰나에도 그는 마음을 굳게 닫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기회를 잘 인식하자. 지금 용기를 내어 돌이키지 않으면 이 치우친 길이 언제 다시 올바로 잡힐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용기를 내어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고 내 삶을 돌이키자. 나는 주님을 팔아넘기는 자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 목숨을 드리는 자가 되길 원한다. 

노래하는 현호색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