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1) 안식후 첫날 두 마리아와 살로메가 두덤에 가보니 돌이 굴려져 있고 그 안에 앉아있던 흰옷 입은 청년(천사)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갈릴리로 가셨다고 말했다. 

2) 마리아게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으나, 믿지않았다. 두 사람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니 역시 믿지 않았다. 열 한제자가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지 않은 것에 대해 믿음이 없고 완악하다고 꾸짖으셨다.

3)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하셨고, 믿는 자들에게는 귀신 내쫓기, 방언, 뱀을 들으며, 독을 마시며, 병든 자를 고친다고 하셨다. 이 말씀 후 하늘로 올려지셨고, 제자들은 나가 두루 전파하였고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이 장사지낸 바 되었던 무덤에는 천자 하나만 남아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셨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무거운 돌이 굴려진 것도 이상하였고, 세마포에 싸여 누워계셔야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도 이상하였다. 후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신을 훔쳐가놓고 부활하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흰 옷입은 청년을 만나고 서로 대화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고 세 명씩이나 이 광경을 목격하였으니, 얼마든지 증인이 있을텐데,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안타깝다. 

2) 예수님은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직접 보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들의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적어도 세번 이상 말씀하셨지만,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제자들은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는데, 제자들이 가는 곳에는 늘 주님이 함께 하셨고, 이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사역의 모습을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기 위해 나타난 표적들은 목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적용

안식후 첫날 주님은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이것을 본대로 제자들에게 증언할 임무가 주어졌다. 제자들이 사역할 때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마치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주님이 일하셨다. 

오늘날 제자인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바쁜 일상의 삶 속에서 내 삶이 어디로 방향성을 갖고 흘러가고 있는가?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지상 명령이 내 머리 속에 맴돈다. 이제 더욱 이 일에 정진해야할 것이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이제 사셨는데, 이 놀라운 일들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 이미 나를 소유하신 분이 하시는 일에 다만 순종함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자. 

사망권세 이기고 다시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평생에 이 승리를 누리며 주의 높으신 이름을 올려드립니다.

 

 

 

 

 

말씀: 

1) 세시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6시부터 어둠이 임하더니 9시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고 운명하시다. 성소의 휘장이 쉬로부터 갈라지고 백부장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함

2) 멀리서 바라보던 여자중에 에수님을 섬기던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야고보, 요세의 어머니), 살로메가 있었다. 

3) 존경받는 공회원 요셉이 에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세마포로 싸서 바위속 무덤에 두고 문을 닫았다. 

 

묵상: 

1)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 시간 동안이나 하늘이 흐려졌다. 한낮인 정오에 갑자기 하늘이 어둑해지니 사람들은 이게 무슨 징조냐하며 의아해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시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 같은 영적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우셨겠는가?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이 예수님의 외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예수님을 외침을 들은 시람들은 무슨 이적이 나타나지 않을까하여 지켜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냥 그렇게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가 노출된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이 베일에 가렸던 지성소를 제사장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성소를 목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줄을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에 이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된것이다. 이 일을 묵묵히 지켜본 백부장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드님이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늘 색이 변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보고 이런 고백을 안한 대다수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 아닌가? 누구든 마음 문을 열고 바라보면 복음으로 생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가니, 생명에 이르기가 어렵다. 

2) 여자들은 그 장소 가까이에 가지 못하고 멀리서 이것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예수님을 곁에서 섬기던 자들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심히 마음이 괴로웠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따라온 여자들, 갈릴리에서 섬기던 여자들, 이들에게는 가정이 있고 할 일이 있었을텐데, 이 멀리까지 예수님을 따라 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우선순위가 자신들이 지켜야할 가정이나 일이 아니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살아계실 동안 주님 곁에서 훈련받고 말씀으로 양육받기를 택했던 그들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을 것이다. 

3)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하게 시체를 요구했을 것이다. 총독 빌라도는 황당했을 것이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한 회원이 와서 당돌하게 하는 요구를 하니 그냥 줘버리라고 한다. 이 요셉은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사형을 결정하고 그분을 죽음에 몰아넣을 때 그는 많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님을 고운 베로 싸서 자신이 미리 마련해 두었던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사용했다. 여기 단 한곳에 나오지만, 이 요셉의 선행은 지금까지도 성경에 기록되어 칭송받을 만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셨지만, 많은 사람이 섬겼고 심지어는 죽어서까지 묻힐 무덤을 얻을 수 있었다. 

 

적용: 

예수님이 운명하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6시간 동안 겪으면서 절규하시면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사역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시면서 인류의 죄악을 온몸에 짊어지셨다. 죄가 없으신 분의 희생으로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예수님의 운명으로 갑자기 숙연해진다. 2020년 부활절이 교회도 못가고 방송예배를 보면서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 170여만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최소 1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전세계에 이유도 없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10만명이 짧은 시간동안 사망에 이르렀으니, 이 얼마나 중한 위기인가? 이런 재난 속에 맞이하는 부활절이라 더 마음이 씁쓸하다. 어둠의 나락으로 깊이 빠져 들어만 가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삶인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부활하고 부흥하는 길은 무엇인가? 백부장처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존경받는 공회원 요셉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가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사는 것인가? 다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복음은 그 빛을 발할 것이다.

주님! 원치 않는 질병으로 제대로 치료도 못받아보고 죽어가는 뭇 영혼들에게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이제라도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를 믿게 하소서. 한 영혼이라도 이 고통으로 인해 과연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고백이 나오게 하소서.  아멘. 

말씀: 

1) 군인들이 예수님께 자색옷과 가신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함

2)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으며 3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3) 지나던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해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조롱함.

 

묵상: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가 못박히셨다.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달아 조롱하며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을 찢어지듯 아팠을텐데,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게된 예수님께 동정심을 베풀지 않았다.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든지, 구원에 이르렀다고 선포했던 많은 행적들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라도 돌이켰으면 좋았을 것을 무력하게 죽어가는 한 죄인으로만 인식했기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도 충분히 피하거나, 변호할 기회가 있었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필연코 십자가를 지셔야만했다. 그 이유가 바로 지금 조롱하는 수많은 군중때문이라는 것을 저들은 모른체 생명의 은인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모든 믿는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나, 그분이 겪었던 극심한 고통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내려오셨고 우리가 그 자리에 매달릴 차례이다. 이런 고통이 없다면 어찌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적용: 

예수님의 십자가, 그 십자가 이제 내가 지고 주님을 따르려네.

주님께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는데, 

어느새 내 어깨위에는 그 십자가가 사라져 버렸네.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깊이 새겼던 결심이 사라져 버리고, 

즐거운 일만 바라는 내 삶에 그 흔적도 사라져 가고

조롱하는 무리에 끼어 나도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사신 예수님만 사시는 것이요. 

십자가 고난 두려우나, 이것이 사는 길이요 살리는 길이라면

기꺼이 지고 주님 따르리라. 

말씀: 

1)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예수님은 그 말이 옳다고 대답하신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니 예수님은 대답을 아니하신다. 빌라도는 이것을 놀랍게 여겼다. 

2) 명절이 되면 죄수 한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냐고 묻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다. 빌라도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길래 그러냐고 하자 무리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다. 

 

묵상: 

1) 대제사장들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한 죄는 하나님 모독죄였는데, 빌라도 법정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일로 죄목을 정하였다. 게다가 대제사장들은 그동안 그들이 발견한 죄가 될만한 일들을 모조리 고해 바쳤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 말이 옳도다' 뿐이었다. 어제 말씀처럼 예수님은 변명하지도 않았고 자신에 대한 정죄에 대해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도 않으셨다. 대의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도 다 맞다고만 하셨다. 이런 의연한 모습에 빌라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죽을 수도 있는 위급한 순간에 이렇게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변함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주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2) 민란을 꾸미고 살인한 자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무리들의 외침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냐고 도리어 항변하였다. 빌라도가 보기에도 죽을만한 죄를 지은게 없고 다만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일 뿐인데 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몇 번이나 번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백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제사장의 충동질은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있다면 믿고 따랐을 때 이 공동체가 더 건강해지고 구성원에게는 더 유익함이 넘칠 텐데, 유대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급급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분위기에 휩쓸려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고 깨어 기도하자. 내 갈길을 잘 아시고 나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은가? 

 

적용:

주님, 저에게도 생명의 위협에도 요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주소서. 너무 사소한 일 심지어는 내 목숨을 해하지도 않고 그런 일이 있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너무 작은 일에 심히 흔들리는 제 연약한 마음을 늘 봅니다. 진리만을 말하며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다만 충성된 자가 되게 하소서. 

저에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결정할 때마다 말씀하여 주시고 지혜를 주소서.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소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도 그냥 내어주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대다수 군중의 의견에 반하더라도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은 용기를 주소서.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우선 기억하게 하소서. 

말씀: 

1)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온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나 그를 칠 증거를 얻지 못했다. 거짓증거를 하되 성전을 헐고 3일동안 지으리라하는 말로 서로 논쟁을 벌였다. 

2) 침묵하시는 예수님, 결국에는 찬송받을 이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니,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조롱하였다.

3) 여종이 베드로에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알지 못한다고 세번을 부인하니 닭이 두번 울었다.

함께 있었다. -->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몰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그 도당이다 --> 부인함

참으로 그 도당이다. --> 저주하며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묵상: 

1) 예수님을 잡아오기는 했으나, 덮어씌울 적당한 죄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끼리도 설왕설래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세상에서 잘못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저것 많은 죄를 지고 잡혀왔다면 온갖 목록을 들이대며 고소하였을텐데, 잡아온 당사자들조차도 무슨 죄인지 몰라 헤매었으니, 예수님의 결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예수님은 일일히 댓구하지 않으셨다. 대의를 중시하고 지금 십자가를 지어야만 하는 마당에 변호를 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표정은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여유였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을 꼬투리 잡아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모습으로 잡혀온 이 청년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높히니 바로 이거다라고 하면서 죽임을 당하게할 결정적인 죄목으로 정하게 된다. 

3) 베드로는 예수님이 받는 재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멀찍이 따라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불을쪼고 있었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세번씩이나 그 당이라고 다그쳤지만 끝끝내 아니라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달ㄲ이 두번 울고 말았다.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퍼뜩 떠오르면서 베드로의 정신이 확 들었을 것이다. 심문을 받으시면서 저 멀찌감치 앉아있던 베드로와 당신을 부인하며 여종에게 능욕당하는 제자의 모습과 닭울음소리. 베드로는 민망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적용: 

나는 세상에 대해 변명하는가? 때로는 예수님 믿는 일로 오해를 받고 다른 사람을 비난을 받아도 그것이 주를 위한 일이며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면 내가 받을 부끄러움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는가? 사람들이 하는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내 속사람을 정확히 아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을 바라보자. 주님은 내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손해보는 삶을 살자. 이것이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길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주님이 영광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말도 안되는 심문을 받으시면서 대의를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단 한마의의 중요한 말만을 하셨다. 

베드로는 주의 수제자이나, 여전히 다혈질이고 연약한 존재였다. 그런 베드로의 모습이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은혜다. 나도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약삭빠르며 이타적이지 못하고 이중적이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세상에 빛을 비추기는 커녕 제 앞가름도 제대로 못하는 나이기에 더욱 소망을 가져본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며 저도 세번씩이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보다 훨씬 모자란 제자이니 주의 도우심을 구하자. 어찌 주님 도움없이 이 하루를 살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위기와 위험 속에서도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오늘 수술 가운데 함께 해주시고 장루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분을 위한 지혜를 구하자.

말씀: 

1)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보낸 무리와 함께 유다가 와서 입을 맞추는 분이 예수님이니 잡아 끌어가라고 함.

2) 그들이 예수님을 잡을 때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칼로 떨어뜨렸다. 예수님은 날마다 함께 성전에 머물렀는데 잡지아니하여놓고서는 이제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잡으러 온 이유가 무엇이냐하고 하시면서 성경을 이루신다고 하심.

3) 제자들은 벗은 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묵상: 

1)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팔아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는가? 하지만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니,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하다. 이 유다는 우리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악한 탐욕이 죄를 우리 안에 키우고 있다. 

2,3) 검과 몽치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의연하셨다. 평소 사역 때에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셨지만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다만 성경을 이루려고 이 모든 상황에 순응하셨다. 베드로의 급작스러운 행동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나나내준다. 그 딴에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수제자로서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 직후에 제자들이 모인 행동은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뿐이었다. 예수님이 잡히시게 되면서  민란을 일으키려는 자의 공범으로서 죄를 물을 것이 두려워 도망갔을 것이다. 바로 전에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놓고 이런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의 힘을 빌려 그 자리를 모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씀을 이루려고 순한 양같이 끝려가셨다. 불법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저항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고 비방하였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의연함에 놀라며 과연 이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적용:

예수님의 참 제자와 배반한 제자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이나 겉옷을 버려두고 알몸으로 모두 도망간 것이나 뭐가 다른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유다를 비방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충성된 제자의 모습은 허울에 불과하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유다의 모습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 제자들의 모습이 연약한 나의 모습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어떻게 돌변할지 우리도 모른다. 자신도 놀랄 이런 모습에 다시 회개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고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님의 의연함을 배우자. 그분이 폭력에 대처하는 모습의 당위성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할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는 되겠는가? 가장 최악의 경우가 죽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죽은 이후의 삶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면 그들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의 악과 폭력에 대하여 말씀 안에 거하여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담대하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이시며 나를 돕고 계심을 잊지 말자. 예수님의 현명한 행동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다.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은 다만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

말씀: 

1) 겟세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머물라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고, 이때 예수님의 마음 상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2) 기도하고 돌아오시니 제자들이 자고 있었고,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냐고 말씀하시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은 이제 잡혀갈 시간이 다 되었고, 인간적 연약함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셨다. 얼마나 그 두려움이 컸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잔을 물리쳐주시길 기도했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셨지만, 육신을 갖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겪을 가장 큰 고통을 미리 아시고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아버지를 부르는 그 간절한 기도 속에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그 고난이 얼만 큰 것일지를 가늠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큰 진노를 기억하며 큰 고통 가운데 신음하였지만,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은 잊지 않으셨다. 

2) 제자들은 심히 피곤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겪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여느 때와 비슷하게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자신들은 선생님이 왜 안 오시나 하면서 졸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당부를 못 지킨 제자들의 큰 문제는 공감의 부족이었다고 본다. 얼마나 중차대한 일이 곧 일어날 것인데, 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졸리면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가진 제자들이었지만, 이에 주님의 능력이 더해질 때 위대한 사역자로 거듭날 수 있다. 

 

적용: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을 떠올리면 고통스럽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의 짐이었던지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내뱉는 주님의 절규를 듣자면, 한없이 숙연해진다. 이번 주 시작되는 고난주간 동안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드렸던 예수님의 고난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기만 하면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 일은 우리는 흉내조차 못 낼 것들이다. 그 대가가 얼마나 컸던지 그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깨닫는다면 어찌 전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신음하듯 고통스러워했던 주님의 기도 장소를 숙연하게 지켜보는 하루가 되길 빌어본다. 

제자들의 연약함이 도리어 은혜다. 강한 용사가 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제자로서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의 연약함이나 제자들의 연약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강한 주의 군사로 거듭나기를 힘쓰자.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것이 이루졌다는 고백을 드려야 할 것이다. 

말씀: 

1)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며 그것이 예수님의 몸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찬식을 하셨다. 

2) 감람산으로 가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임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묵상: 

1)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 성내에 들어가셔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셨다. 평소와 같이 떡을 떼고 잔을 나누셨는데, 이번에는 이 떡과 잔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셨다.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 하셨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다. 몸을 먹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부를 몸안에 들어오게 한 것이고 이 떡이 소화가 되어 명양분이 몸에 남아 자신들의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 이 떡을 먹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잔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새것으로 다시 마실 것을 약속하셨다. 

2)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그날 밤 닭이 두 번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극구 부인하면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가 분명 예수님을 버릴 텐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을 것이다. 

 

적용: 

예수님께서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로 예수님의 일부가 되게 하신 일이 감사하다.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 결합은 단지 사상의 동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통해 매번 이루어지는 성찬식을 통해 그를 기념하고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되었음을 세상에 대하여 선포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흘리신 피가 그를 믿는 자마다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베드로의 고백은 누가 보아도 충성된 제자의 본연된 모습이었으나, 베드로는 후에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얼마나 많이 깨닫고 겸허 해졌겠는가? 나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한 커다란 위험이 닥쳤을 때 어떤 모습을 취할 것인가 궁금하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하면서 생을 마감할 자신이 있는가? 한번 죽는 것이니 그 죽음으로 단 한 명이라도 생명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값진 죽음이 될 것이다. 기도하기를 살아있는 동안에 목숨을 걸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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