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020. 3. 31. 08:23

말씀: 

1) 다윗이 '주(하나님)께서 내 주(예수님)께 이르시되 내(하나님)가 네(예수님) 원수를 네(에수님)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라' 

시110:1 여호와(퀴리오스)께서 내 주(퀴리오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예수님)라 하였으니 주(예수님)는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고 강론하심

2)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님, 시장에서 문안 받음, 회당의 높은 자리, 잔치의 윗자리를 원함. 과부의 가산을 삼킴,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 --> 이 사람들을 삼가라

3) 헌금함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음. 예수님이 이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시고 그 이유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넣었기 때문이라 하심. 

 

묵상: 

1)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에 대한 언급한 다윗의 시를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음을 설명하셨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그분이 어떤 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왔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 왕국을 재
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다윗왕이 세운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자신들이 회복해야할 최고의 가치였다.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에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가진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하던 메시아는 이런 왕의 모습으로 왔어야만 했을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어야 함을 강조했을 것이다.

2)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인척 하였으나, 그 삶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당연히 신앙인의 모범을 보이는 것 같았으나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남의 것을 강제로 취하고 거룩한 척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피해야 마땅할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조금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으나 겉모습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액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현 시대에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과부의 헌금을 소중히 볼 수 있는 눈을 갖자. 예수님이 왜 다른 사람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겠는가?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수치에 익숙해져 있어서 사람도 그 수치의 잣대로 보기 쉽다. 예수님처럼 진정성을 보며 그 이면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하자. 

 

적용: 

1) 다윗의 시에 나타난 두분의 주님 가운데 한분은 하나님이시고 한분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셨다. 다윗이 이것을 안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었는데, 이 놀라운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다 암송하고 계셨을 것이다. 마음에 말씀이 녹아져 있으면 언제든 꺼내어 되새김질할 수 있다. 깊이 있는 묵상과 성경 읽기를 통해 말씀이 체화되도록 해야겠다. 

2-3) 여기 나와있는 서기관들고 가난한 여인은 너무 대별이 된다. 한 부류의 사람은 요즘 같으면 교회에서 인정받고 헌금도 많이 내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일 것이고, 이 가난한 여인은 슬며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드려야 할 텐데 가진 것이 없으니 두 렙돈이라도 드렸다. 너무 적은 액수였지만, 예수님은 많다고 하셨다. 주님 앞에 숫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주님의 능력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그 숫자들이 없어서 존재하기 어려워하시지도 않는다. 부족함이 없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우리의 영적 예배가 주님께 흠향되는 것은 진실로 드린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부들의 재산을 염치없이 착취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특별한 신앙인이라고 여겼겠지만, 예수님의 예리한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선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셨다. 스스로 서기관이 되기를 바라는 나는 이제 과부의 심정으로 두 렙돈을 간절함으로 드리는 겸허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기도: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우리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놀라운 비밀을 밝히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눈을 열어 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더 많이 이 비밀들을 이해하도록 지혜를 주소서. 

가난한 과부의 진실한 헌금을 칭찬하며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외모로 행하는 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게 하시고 진실한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자녀로 누구든 존중할 마음을 저에게 주소서. 아멘.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30. 10:22

말씀: 

1)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이 없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일곱 형제가 맏형의 아내에게 장가들어 죽어 부활했을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은 시집 장가가 없고 천사들과 같다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 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

2) 호의적인 한 서기관이 첫째되는 계명을 물으니 1. 하나님 사랑 2.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고, 그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않았다고 칭찬하심.

 

묵상: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부활이 있다고 하시니, 난해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주장이 틀렸음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한가족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상태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산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살아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세계가 있고 생명 있는 자는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육체의 부활도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선례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서기관의 질문에 율법 전체를 요약하여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너무 명쾌한 진리 앞에서는 일을 다물게 마련이다. 

여기 나오는 두사람 사두개인과 한 서기관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흠집을 내려고 나온 것이고 한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나왔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도 달랐다. 사두개인은 그것도 모르는가, 모세 오경도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하며 논리적으로 그를 굴복시켰고 서기관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칭찬하셨다. 과연 그런가 하여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뜻을 헤아리려 할 때 좋은 선생님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확한 깨달을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단지 조상 대대로 그 민족을 살피셨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시점의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지금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생명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가 실로 놀랍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부활을 소망하며 주신 이 몸도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다. 

 

적용: 

예수님과 토론하듯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음을 주실 때마다 감사하자. 철저한 신뢰는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 이것이 없다면 나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주님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 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열매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감사드리자.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29. 11:24

말씀: 

1)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계속해서 해를 입히고 죽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상속자인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하였다. 나중에 주인이 이 농부들에 대하여 진멸하고 포도원을 남에게 줄 것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대적하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을 향한 것이었고 그들이 이를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나 무리가 두려워 그냥 갔다. 

2)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 외식함을 아시고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면서 데나리온 하나를 보시며 가이사의 형상이 있으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님께 바치라 하셨다. 

 

묵상:

1) 하나님의 포도원을 잠시 맡아 운영하는 농부들은 세상사람들과 같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따로 있다. 울타리를 두고 틀과 망대를 만들어 소출을 나게 다 만들어 놓고 운영을 맡긴 것이었다. 농부들은 욕심을 냈다. 그 소유자가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양 생각하고 당연히 바쳐야 할 소출의 일부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덕에 복음을 전하러 보낸 주의 사자들을 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는가? 주인은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그 마저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것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니다. 다만 포도원의 농부같이 세를 얻어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소출을 내다보니 그 일부라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깝게 생각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는 착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포도원에 일하게 해 주시고 고정적인 수입을 얻게 해 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되어 그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 주인이신 하나님과 농부인 사람들이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 때문이었다. 끝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이슬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만, 건축자의 버린 돌이 완성된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그 아들이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은 무엇인가? 동전은 로마에 세금으로 내고 각종 산물로 성전에 제물로 드리라는 말인가? 그당시 성전세도 이 동전으로 낸 것을 생각하면 똑같은 동전을 내되,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헌금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COVID-19로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하고 교회에서 드리는 회중 예배를 자제하기를 당부하였을 때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강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우리는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모여 예배를 들리라고 하였으니, 하나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성남의 모교회가 집단 감염을 일으켰고, 그곳에 사는 주민 말에 의하면 교회 간판을 내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작금의 사태를 종교탄압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며 믿음으로 모인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믿음인가?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 삶을 돌아보아 그들이 진실로 세상의 모범을 보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초대교회의 카타콤의 신앙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웃과 부조화하며 이기적 종교단체였다면 개신교 교회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초해할 것이다. 그 교회에 그렇게 사람이 모여들어도 한 사람도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왜 모였냐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할 텐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집단 감염을 일으키니 전국의 모든 개신교 교단이 욕을 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박해에도 꿋꿋하게 공예배의 전통을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배의 공공성도 생각해야 한다. 예배가 칼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준다면 당연히 중단해야 한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 전역이 고통받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모이는 것을 삼가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1917년 스페인 독감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이 질병을 극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도리어 집단 발병이 되어 수많은 신도들이 죽어나갔던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신앙이 믿음이 아니라 무지함에서 나오는 미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용: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깊은 산속에서 산초를 뜯어 먹으며 근근하게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보면 도리어 부럽다. 현대인의 삶의 구조는 건강을 해치고 몸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만들어가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이 먹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비정상적인 것들로 인생이 즐거움을 찾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남들 보기에 부럽고 내세우려고 사는 것인가? 남들의 부러움을 사도 정작 당사자들은 많은 마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이 얻으려 하고 가진 것을 지켜려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태어날 때 부모가 가진 부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쌓아두어도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몸에 금붙이를 두르고 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끝도 없는 욕심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가?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감사하자. 지금 가진 너무 많은 것들을 이웃과 나누자. 나는 관리하는 사람이지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