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1) 제자들이 유월절에 먹을 음식과 장소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여쭈니 물 한 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한 다락방을 안내받으라 하셨고, 그들은 말씀대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

2) 먹을 때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하셨고,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이 유월절을 보낼 다락방을 준비하신 내막이 이럴 것이다.

유월절이 되기 며칠전에 성내로 들어가 적당한 다락방을 발견하시고, 그 주인에게

'혹시 우리가 이 곳에서 유월절을 보낼 수가 있겠소?'

하고 물으니 그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

'기꺼이 내어드릴테니 사용하세요'

예수님께서 

'무교절의 첫날(목요일) 아무 때에 내가 제자 둘을 보낼 텐데 안내를 해주시오'

라고 말씀하시니 그 주인이 대답하기를

'아 그때라면 우리집 하인이 동문 근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시간이니 물동이 하나를 진 남자 하인을 발견하면 따라가라고 해주세요. 집에 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시에 제자 둘을 보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장소를 안내받고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하셨다. 

또 하나의 가정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 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내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텐데 그를 따라가라. 그 집에 이르거든 집주인에게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냐고 물어라. 그리하면 큰 다락방을 보여줄 텐데 거기서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

이에 제자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나는 후자를 더 신뢰한다. 왜냐하면 물을 길러온 하인이 딱 한 사람만 있었을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집이 어디인 줄 미리 아셨다면 그 집의 위치를 알려주시면서 '미리 부탁해두었으니 그 집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라'라고 하셨을 텐데, 물동이를 진 사람을 따라가라는 것은 확률적으로 엉뚱한 집을 찾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운 예수님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 때에 나귀를 데려오는 과정도 비슷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수소문해 그 집을 찾아가서 나귀의 상태를 확인하고 '모일 모시에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쓰려고 하니, 제자들을 보내주면 잠시 나귀를 빌려주세요.'라고 미리 준비를 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의 철저한 준비성인가 아니면 초자연적 전지능인가? 

2) 예수님께서 처음 가룟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셨을 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말씀에는 누가 자신을 배반하여 팔아넘길 것인지를 안다고 하셨다. 유다가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을 배반할 결심을 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협조하겠다고 말한 이후에 이 사실을 예수님이 인지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은 마음을 읽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가룟유다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알아차리셨나 하면서 마음이 뜨끔했을 것이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유다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적용: 

유월절은 성내에서 보내야한다는 전통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서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그 배후에는 예수님의 완벽한 전지성 또는 준비성이 있었고, 이에 따른 제자들의 순종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자인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매번 경이로움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 되는 요구인 것 같아도 따라 순종하면 나중에 그 내막을 이해하게 된다. 맹목적인 순종이 지식으로 이해하는 순종보다 낫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인 태도이며 가장 상식적으로 사는 삶의 극치가 될 것이다. 

유다에게 주어진 또한번의 회개의 기회가 지금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주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는 명확한 언급이 주어졌고 누구라도 자신이 그 사람임이 밝혀질 찰나에도 그는 마음을 굳게 닫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기회를 잘 인식하자. 지금 용기를 내어 돌이키지 않으면 이 치우친 길이 언제 다시 올바로 잡힐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용기를 내어 주님의 요청에 응답하고 내 삶을 돌이키자. 나는 주님을 팔아넘기는 자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 목숨을 드리는 자가 되길 원한다. 

노래하는 현호색

말씀: 

1) 예수님을 죽이려는 흉계를 세우던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명절이니 피하자고 함. 

2)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나드 한 옥합(한 근; 340g 요12:3)을 예수님 머리에 부으니 사람들이 아깝다고 화를 냈다. 예수님은 가만두라고 하시고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례 준비가 돼버린 이 여자의 행동은 길이 기억될 것이라고 하셨다. 

3) 돈을 받기로 하고 가룟 유다가 에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하였다. 

 

묵상: 

1)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쓴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존재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숨겨진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가르치는 말씀마다 자신들의 하던 것과 비교도 안되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큰 위험 요소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빌라도도 후일에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의 종교에 관한 것뿐이라 죽을만한 형량에 미치지 못하고 판단하였지만, 그들은 국가 정복을 도모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 씌워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야 말았다.

3) 가룟유다의 배반은 그 공동체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왜 예수님이 이런 사람을 제자로 세우셨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가룟 유다에 대한 기대와 그가 갖고 있는 고유의 장점들을 보셨을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인간적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표면적으로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작정하였으니 돈에 욕심을 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 돈을 밭에 던진 것을 보면 예수님을 시기하거나 골탕 먹이려는 의도 또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했던 기대에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으리라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다를 통해서도 십자가 구속 사역의 한 역할을 맡기셨으니 가룟 유다의 일로 우리가 선한 일이면 선한 일로 악한 일이면 악한 일로도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스스로가 사탄에게 내어준 바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2) 한 여인의 온전한 드림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다.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을 생각을 왜 했을까? 끈적한 기름을 머리에 부었을 때 '여인이여 이게 뭐 하는 것이여?'라고 도리어 호통을 치셔야 할 텐데 도리어 칭찬을 하셨다. 여인은 그 비싼 가치 있는 물건을 곧 죽음에 다다를 예수님을 위해 썼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 장사되기 전에 기름을 바르던 문화에 빗대어 그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맞다면 이 여인도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죽게 될 것을 가르친 것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이 행위를 통해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셨고. 이 것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이요 히브리어는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화를 낸 이유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귀한 것을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향유를 자신들에게 기부한다면 그것을 팔아서 1년 치 급여만큼의 돈을 획득해 그것으로 더 좋은 일에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때문에 낭비라고 여겼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다. 낭비 같았지만, 그 행위는 꼭 있어야 할 상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적용: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는 사람들에게는 비합리적 행동이었지만, 장례를 준비하거나 그리스로 일컬음을 받는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행위였다. 마리아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려 하는 그 순수한 마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선한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했더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려졌더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늘 주님을 위해 내가 낭비해야 할 거룩한 일은 무엇일까? 아깝고 비합리적인 일,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기뻐하실 일, 그런 일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자.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까지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만드는 일에 일조를 했다. 나의 행위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가? 이 어려운 시기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욕하며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묵묵히 이겨내면 곧 승리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주님의 죽음이 패배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전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 되지 않았던가?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잃지 말자. 커 보여도 지나고 보연 사소한 이 일로 흔들리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주님께 충성된 종으로 끝까지 남기를 애써보자. 

말씀: 

1) 가증한 것?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 지붕, 밭, 환난의 날, 겨울에 일어나지 않기를...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선지자들이 나타나며 미혹하려들 것이다. 

2) 해, 달, 별의 변화,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모으리라

3) 무화과 나무를 보고 여름이 오는 것을 알듯이 이런 일을 보거든 인자가 이른 줄 알라. 그때는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묵상: 

환난의 날이 있은 후에 예수님이 오시고 성도들은 들려올림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만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인이 일을 맡겨놓고 타국을 갔는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일을 맡기고. 문지기가 주인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졸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 다시 오시길 고대하며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를 말한다. 

1) 마지막 환난의 날에 세상은 혼돈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사방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여기저기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자신을 따르라고 미혹하는 자가 넘쳐날 것이다. 이 환난의 날들은 성도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고 몇몇은 그들의 꾐에 넘어가 옳지 않은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얼마나 힘든 일이면 믿는 자들을 위해 이 날들을 감하셨다고 하시겠는가? 지금이 환난의 날이 아닌가? 문명의 혜택을 보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삶의 온전성에 항상 미달하며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연이 파괴돼서 인성이 무너지며 맘몬을 섬기는 사람들로 바뀌어 가고 있고 문명의 이기는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곳곳에서 재난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돌고 오염으로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는 이 세상이 백 년, 천년 전보다 더 좋은 세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사람의 각자의 삶은 나름의 방향성이 있고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있기 마련인데, 이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일 것이다. 

2) 태양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에너지원은 태양인데, 이것이 빛을 잃는다면 얼마나 참혹한 일이 발생할 것인가?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지구 전체에 빙하가 덮힐 것이라고 한다. 해가 어두워지니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면 누구나 두렵고 떨릴 것이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니, 성도들은 얼마나 이 순간을 감사해하겠는가? 이제까지 신자로서 받았던 고통을 한순간에 떨쳐버리고 이제까지 새겨온 말씀이 드디어 실현되는 역사적 현장에서 모두 다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을 때 그 영광의 자리에 나아간 지체들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다 표현하랴..

3) 무화과 나무에 새 가지들이 올라오고 이파리가 달리기 시작하면 여름이 가까워오는 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위에서 말한 환난 날의 징조와 인자의 오실 때의 천체의 변화를 보면 이제야 주님이 오시는구나 하고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다만 하나님만 아신다. 하나님이 그 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시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은 오래 참아 기다림으로 한 영혼이라도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종들로 주님께서 잠시 타국에 가실 때 주인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면서 그에 걸맞는 권리도 주시고 가셨다.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 올지 모르니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특히 문지기는 졸지 말고 출입문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주인이 다시 오시면 가장 먼저 문을 열어드리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 문지기인가? 모두 자신이 맡은 고유한 사역의 영역들이 있다. 모두가 문지기가 될 수는 없으나 그들 중에 가장 건강하고 힘이 세며 체력이 좋은 사람, 그리고 주인인지 아니면 주인을 가장한 거짓 선지자인지를 구분해 낼 수 있는 사람.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책임질만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은 지금 졸려서 잠을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깨어 있으라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켜주겠지 하고 경계심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문지기의 소명을 인식하고 성실하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적용: 

주님,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운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전 세계에 판데믹한 전염병이 돌아 그렇게 당당하던 미국의 국민들조차도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가지에 이파리가 돋기 시작하는 것을 제가 보고 있는 것일까요? 한 영혼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저에게 보여주는 징조들일까요? 당장 병원 매출이 줄어들고 경제가 어려워져서 얼른 이 사태가 끝나기만을 바라라고 이런 일이 생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주님의 문지기가 되어 주인이신 주님 언제 오실지 고대하며 깨어 있는 하루를 보내려합니다. 졸음을 쫓아주시고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매 순간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바라며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묵상하게 하소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 지혜를 주시고 고투하고 있는 동료들과 환자들에게 힘을 더하여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1) 성전의 돌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심

2)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앉으셨을 때에 언제 이런 일이 있겠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때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거짓 예수가 미혹하며, 전쟁의 소문, 전쟁과 기근, 그리스도인의 박해, 가족들끼리 대적함, 등의 징조가 있을 것이며, 복음이 만국에 전파된 다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심. 

잡혀갔을 때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을 하라 하시고, 예수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받을 미움을 끝까지 잘 견뎌 구원에 이르라고 당부하심.

 

묵상: 

1) A.D. 70년 티투스 황제는 성전을 불태우고 도시를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고, 거기서 일하던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같이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1차 유대-로마전쟁중인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성 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다. 9월 8일에 시내에서의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모두 끝났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9C%A0%EB%8C%80-%EB%A1%9C%EB%A7%88_%EC%A0%84%EC%9F%81)

 

2) 장차 있을 일에 대한 예언은 쉽지 않다. 얼마의 확률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추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밖에 안 계시다. 심지어는 그 계획도 하나님의 마음이 변함에 따라 바뀔 수가 있어서 인간이 이런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한 일임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고 그 때에 관해 질문을 했다. 시대의 징조를 보고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심안(心眼)이라고 한다. 시대의 징조를 보고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은 먹구름이 몰려올 때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최소한 이런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그 징조들은 이단의 왕성, 전쟁, 기근, 박해 등이었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이고 하셨다. 이 시대에 우리가 목이 터져라 외쳐도 이런 징조를 바탕으로 세상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설득해도 세상 사람들은 결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이제까지 괜찮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주욱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코비드19 사태가 미국에서 급진적으로 들어갈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는 건강하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해변에서 파티를 열고 즐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불과 며칠 만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를 내었다. 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데 무모하게 불길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안전을 외치는 맹목적 신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지금 세상에 전쟁이 없는가? 기근이 없는가? 

841,950,350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사람  

1,691,178,063

과체중인 사람  

753,491,303

비만인 사람  

11,838

오늘 굶주림으로 사망한 사람

먹지 못해 하루에 만명이상이 사망하고 있는데, 이는 급진적으로 폭증하고 있는 코비드 19로 인한 사망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이 환영받지 못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개독교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각종 사회적 이슈에 약방의 감초처럼 기독교인들이 끼어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갖는 신앙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현상이 생겨나고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중 대다수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받는 비난이니 하늘의 상이 없을 것이나 개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세상을 섬긴 사람들이 있으니 이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니 두려워 말며 이 고난 뒤에는 구원의 완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심으로 위로를 하고 계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스스로 신앙인이라 하면서 개독교인의 삶을 살고 있는 교인들이 자신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받는 고난을 십자가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사람이다.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죄가 있어 매를 맞아놓고 무슨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때에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더욱 각박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 어둔 세상을 밝힐 사명을 기억하자. 주님은 이렇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 결과가 성도가 받는 고난이라 하더라고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적용: 

주님, 하나님을 모시고 지성소에서 교감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라도 남지않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 성전이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며 자신들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지만, 단숨에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상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깨끗이 하셨을 때라도 뉘우치고 그 삶을 돌이켰더라면 이런 최악의 결과는 맞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의 경고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갔습니다. 우리에게 안정감을 갖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주님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 자리에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임에도 마치 내가 이룬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나의 미련함을 용서하소서.

제가 저지른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로 마치 십자가의 길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러면서 또 남들을 원망하곤 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저 사람이 이유도 없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이 어느 것 하나도 우연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일만 제게 허락하소서. 어느 날 제 입에서도 애매하게 고난을 받았다는 고백이 나오게 하시고 이로 인하여 참 신앙생활의 품격을 깨닫게 하소서.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한가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 입을 열어 증거 하게 하시고 이 대가를 통해 뭇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구 통계 출처: https://www.worldometers.info/kr/

 

Worldometer - 실시간 세계 통계

Translated from English to Korean by MINCHO JEONG

www.worldometers.info

 

 

말씀: 

1) 다윗이 '주(하나님)께서 내 주(예수님)께 이르시되 내(하나님)가 네(예수님) 원수를 네(에수님)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라' 

시110:1 여호와(퀴리오스)께서 내 주(퀴리오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예수님)라 하였으니 주(예수님)는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고 강론하심

2)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님, 시장에서 문안 받음, 회당의 높은 자리, 잔치의 윗자리를 원함. 과부의 가산을 삼킴, 외식으로 길게 기도함 --> 이 사람들을 삼가라

3) 헌금함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음. 예수님이 이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하시고 그 이유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넣었기 때문이라 하심. 

 

묵상: 

1)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에 대한 언급한 다윗의 시를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음을 설명하셨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고 그분이 어떤 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왔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 왕국을 재
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다윗왕이 세운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자신들이 회복해야할 최고의 가치였다.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에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가진 유대인의 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하던 메시아는 이런 왕의 모습으로 왔어야만 했을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어야 함을 강조했을 것이다.

2)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인척 하였으나, 그 삶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당연히 신앙인의 모범을 보이는 것 같았으나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남의 것을 강제로 취하고 거룩한 척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피해야 마땅할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조금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으나 겉모습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액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현 시대에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과부의 헌금을 소중히 볼 수 있는 눈을 갖자. 예수님이 왜 다른 사람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겠는가?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수치에 익숙해져 있어서 사람도 그 수치의 잣대로 보기 쉽다. 예수님처럼 진정성을 보며 그 이면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하자. 

 

적용: 

1) 다윗의 시에 나타난 두분의 주님 가운데 한분은 하나님이시고 한분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셨다. 다윗이 이것을 안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었는데, 이 놀라운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다 암송하고 계셨을 것이다. 마음에 말씀이 녹아져 있으면 언제든 꺼내어 되새김질할 수 있다. 깊이 있는 묵상과 성경 읽기를 통해 말씀이 체화되도록 해야겠다. 

2-3) 여기 나와있는 서기관들고 가난한 여인은 너무 대별이 된다. 한 부류의 사람은 요즘 같으면 교회에서 인정받고 헌금도 많이 내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일 것이고, 이 가난한 여인은 슬며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드려야 할 텐데 가진 것이 없으니 두 렙돈이라도 드렸다. 너무 적은 액수였지만, 예수님은 많다고 하셨다. 주님 앞에 숫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주님의 능력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그 숫자들이 없어서 존재하기 어려워하시지도 않는다. 부족함이 없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헌신이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우리의 영적 예배가 주님께 흠향되는 것은 진실로 드린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부들의 재산을 염치없이 착취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특별한 신앙인이라고 여겼겠지만, 예수님의 예리한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선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셨다. 스스로 서기관이 되기를 바라는 나는 이제 과부의 심정으로 두 렙돈을 간절함으로 드리는 겸허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기도: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우리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놀라운 비밀을 밝히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눈을 열어 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바라기는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더 많이 이 비밀들을 이해하도록 지혜를 주소서. 

가난한 과부의 진실한 헌금을 칭찬하며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외모로 행하는 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게 하시고 진실한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자녀로 누구든 존중할 마음을 저에게 주소서. 아멘.

 

말씀: 

1)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이 없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일곱 형제가 맏형의 아내에게 장가들어 죽어 부활했을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은 시집 장가가 없고 천사들과 같다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 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

2) 호의적인 한 서기관이 첫째되는 계명을 물으니 1. 하나님 사랑 2.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고, 그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니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않았다고 칭찬하심.

 

묵상: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부활이 있다고 하시니, 난해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의 주장이 틀렸음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한가족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상태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산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살아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세계가 있고 생명 있는 자는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육체의 부활도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선례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서기관의 질문에 율법 전체를 요약하여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너무 명쾌한 진리 앞에서는 일을 다물게 마련이다. 

여기 나오는 두사람 사두개인과 한 서기관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흠집을 내려고 나온 것이고 한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나왔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도 달랐다. 사두개인은 그것도 모르는가, 모세 오경도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하며 논리적으로 그를 굴복시켰고 서기관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칭찬하셨다. 과연 그런가 하여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뜻을 헤아리려 할 때 좋은 선생님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확한 깨달을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단지 조상 대대로 그 민족을 살피셨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시점의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지금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생명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가 실로 놀랍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부활을 소망하며 주신 이 몸도 소중히 다뤄야 할 것이다. 

 

적용: 

예수님과 토론하듯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음을 주실 때마다 감사하자. 철저한 신뢰는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 이것이 없다면 나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주님을 위하여 한평생 살다 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열매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하며 감사드리자. 

 

말씀: 

1)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계속해서 해를 입히고 죽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상속자인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하였다. 나중에 주인이 이 농부들에 대하여 진멸하고 포도원을 남에게 줄 것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대적하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을 향한 것이었고 그들이 이를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나 무리가 두려워 그냥 갔다. 

2)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 외식함을 아시고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면서 데나리온 하나를 보시며 가이사의 형상이 있으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님께 바치라 하셨다. 

 

묵상:

1) 하나님의 포도원을 잠시 맡아 운영하는 농부들은 세상사람들과 같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따로 있다. 울타리를 두고 틀과 망대를 만들어 소출을 나게 다 만들어 놓고 운영을 맡긴 것이었다. 농부들은 욕심을 냈다. 그 소유자가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양 생각하고 당연히 바쳐야 할 소출의 일부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덕에 복음을 전하러 보낸 주의 사자들을 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는가? 주인은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그 마저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것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니다. 다만 포도원의 농부같이 세를 얻어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소출을 내다보니 그 일부라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깝게 생각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는 착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포도원에 일하게 해 주시고 고정적인 수입을 얻게 해 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되어 그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 주인이신 하나님과 농부인 사람들이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 때문이었다. 끝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이슬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만, 건축자의 버린 돌이 완성된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그 아들이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은 무엇인가? 동전은 로마에 세금으로 내고 각종 산물로 성전에 제물로 드리라는 말인가? 그당시 성전세도 이 동전으로 낸 것을 생각하면 똑같은 동전을 내되,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헌금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COVID-19로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하고 교회에서 드리는 회중 예배를 자제하기를 당부하였을 때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강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우리는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모여 예배를 들리라고 하였으니, 하나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성남의 모교회가 집단 감염을 일으켰고, 그곳에 사는 주민 말에 의하면 교회 간판을 내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작금의 사태를 종교탄압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며 믿음으로 모인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믿음인가?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 삶을 돌아보아 그들이 진실로 세상의 모범을 보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초대교회의 카타콤의 신앙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웃과 부조화하며 이기적 종교단체였다면 개신교 교회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초해할 것이다. 그 교회에 그렇게 사람이 모여들어도 한 사람도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왜 모였냐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할 텐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집단 감염을 일으키니 전국의 모든 개신교 교단이 욕을 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박해에도 꿋꿋하게 공예배의 전통을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배의 공공성도 생각해야 한다. 예배가 칼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준다면 당연히 중단해야 한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 전역이 고통받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모이는 것을 삼가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1917년 스페인 독감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이 질병을 극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도리어 집단 발병이 되어 수많은 신도들이 죽어나갔던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신앙이 믿음이 아니라 무지함에서 나오는 미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용: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깊은 산속에서 산초를 뜯어 먹으며 근근하게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보면 도리어 부럽다. 현대인의 삶의 구조는 건강을 해치고 몸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만들어가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이 먹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비정상적인 것들로 인생이 즐거움을 찾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남들 보기에 부럽고 내세우려고 사는 것인가? 남들의 부러움을 사도 정작 당사자들은 많은 마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이 얻으려 하고 가진 것을 지켜려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태어날 때 부모가 가진 부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쌓아두어도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몸에 금붙이를 두르고 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끝도 없는 욕심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가?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감사하자. 지금 가진 너무 많은 것들을 이웃과 나누자. 나는 관리하는 사람이지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씀: 

1)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을 목격함

2)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심. 우리도 허물이 많으니 기도할 때 남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심

3) 성전에 다시 나아가시니,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냐고 종교 지도자들이 따져 물음. 질문으로 응대하심.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인가? 땅에서부터 인가?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고, 예수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묵상: 

1)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거라면 예수님의 저주로 뿌리까지 말라죽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인가? 열매를 맺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야할 나무가 때가 이르기도 전에 오해(?)를 받아 죽어버렸으니 억울하기만 한 일인가? 그 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느꼈겠지만, 이것이 바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얼마나 깨달았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그 가운데 서려있는 주님의 메시지를 새겨듣도록 하자. 

2)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기도, 이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이것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말씀하시기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또 기도하는 것을 기도하는 순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해놓고서 속으로 설마 이루어지겠어. 기도니까 말은 했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 삶의 믿음대로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했다면 지금 당장 눈에는 안 보여도 이미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고 믿어야 한다. 한 환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미 난 나았어요'라고 외쳤지만, 결국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단서가 따라오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할 때 이루어진다. 내 욕심으로 내 희망사항을 아무리 기도 속에 표현해보아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위험하거나 유익하지 않은 일이라면 당연히 안 이뤄 주실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실 것이다. 
또 기도하는 가운데, 용서를 하라고 하셨다. 살다보면 미운 사람이 많다. 이유도 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고 늘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도 있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기뻐하듯이 나를 대하는 사람도 있다. 저주를 퍼붓고 무시하면 그만인가? 나도 주님 앞에선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남들에게 그런 존재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탓만 하게 된다. 기도할 때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나도 그들을 용서한다고 아뢰자. 주님께서 이 불편한 관계를 평화의 관계로 바꾸시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도록 하실 것이다. 사랑해야 복음도 전해진다.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저 인간을 사랑하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하신 과격한 행동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것인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이 뭔데 저렇게 난리야. 이 성전이 자기 것이라도 되나? 왜 잘하고 있는 장사를 못하게 하는 거야. 우리도 이 사람들이 더 잘 제사할 수 있도록 좋은 일하고 있는데...' 그 당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거래가 왕성하고 제자를 드린다는 율법을 행하기 위한 외식의 장소였던 것 같다. 분명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들도 어떤 형태로든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33살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난리를 치고 다닌다. 그러니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당당했다. 제가 너무 설쳐대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게요 이러지는 않으셨다. 도리어 요한에 대해 질문을 하시면서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를 묻자 그들은 그렇다 하면 그가 선지자인데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안 그렇다 하면 대중이 선지자로 여기는 요한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엄청나게 머리를 굴렸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예수님의 '나도 너희에게 말 못 하겠다'라는 말에 완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권세로 이 성전(하나님의 집)을 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 대처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더 꼬투리를 잡아 불경건 죄로 주님의 사역이 더 진행되지 않게 막아버렸을 것이다. 

 

적용: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지금의 COVID-19 사태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경제가 파탄나고 의료 자원이 부족해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수만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질병과 고통을 주시는 스케일인 전 세계적인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 누구도 이것이 우연이라 하지 않는다. 욕심을 채우려고 야생동물을 사고팔았거나 인류에게 위협이 될만한 병원체를 만들어 냈거나 뭐가 되었든 그 원천에는 인간의 죄가 도사리고 있다. 내가 그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고 근원지의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역병이 퍼져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걸맞게 땅을 치며 눈물로 회개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꼬인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갈 것이다. 우리가 왜 살고 있는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칠팔십 세가 되어 각종 질병으로 사망에 이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인생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얼마나 한시적인 존재인가? 나는 내가 영원한 존재임을 믿는다. 지금은 잠시 사는 세상일 뿐이다. 정말 잠깐 스쳐가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헤아릴 수 없는 영원의 시간 앞에 겸허하게 우리를 돌아보고 모든 욕심을 내어버리고 크게 바라보자. 

  • 주님, 온 세상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고 이런 저런 이유로 생명을 잃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 없게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엄숙한 경외감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이러할 때일수록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사망에 이르게 될 사람들에게 특별히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전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이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시간의 경계선에서 초접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더욱 힘을 더하여 주소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주님께서 뭇 영혼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펼쳐주소서. 

예수님의 위기대처 능력을 본받자. 누구를 깎아내리지도 비난하며 욕하지도 않으셨다. 한마디의 질문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입을 다물게 했으니 얼마나 통쾌한 승리인가? 어디 해볼 테면 해보자 하면서 경박하게 다투거나, 다 귀찮은데 그래 네가 옳다라면서 대충 넘어가서도 안된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타락한 세상인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 

  • 주님, 저는 지혜가 참 부족합니다. 그냥 마음이 속상하기만 하고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다만 내 눈앞에 안나타기만을 바라며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대면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때마다 성령께서 이 우둔한 입술에 하실 말씀을 넣어주셔서 둘 모두 윈윈하게 도와주소서. 미워하지 않았고 사랑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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