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020. 4. 9. 08:45

말씀: 

1)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예수님은 그 말이 옳다고 대답하신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니 예수님은 대답을 아니하신다. 빌라도는 이것을 놀랍게 여겼다. 

2) 명절이 되면 죄수 한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냐고 묻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다. 빌라도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길래 그러냐고 하자 무리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다. 

 

묵상: 

1) 대제사장들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한 죄는 하나님 모독죄였는데, 빌라도 법정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일로 죄목을 정하였다. 게다가 대제사장들은 그동안 그들이 발견한 죄가 될만한 일들을 모조리 고해 바쳤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 말이 옳도다' 뿐이었다. 어제 말씀처럼 예수님은 변명하지도 않았고 자신에 대한 정죄에 대해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도 않으셨다. 대의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도 다 맞다고만 하셨다. 이런 의연한 모습에 빌라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죽을 수도 있는 위급한 순간에 이렇게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고 변함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주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2) 민란을 꾸미고 살인한 자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무리들의 외침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냐고 도리어 항변하였다. 빌라도가 보기에도 죽을만한 죄를 지은게 없고 다만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일 뿐인데 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몇 번이나 번복할 기회를 주었으나 백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제사장의 충동질은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있다면 믿고 따랐을 때 이 공동체가 더 건강해지고 구성원에게는 더 유익함이 넘칠 텐데, 유대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급급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분위기에 휩쓸려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고 깨어 기도하자. 내 갈길을 잘 아시고 나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은가? 

 

적용:

주님, 저에게도 생명의 위협에도 요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주소서. 너무 사소한 일 심지어는 내 목숨을 해하지도 않고 그런 일이 있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너무 작은 일에 심히 흔들리는 제 연약한 마음을 늘 봅니다. 진리만을 말하며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다만 충성된 자가 되게 하소서. 

저에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결정할 때마다 말씀하여 주시고 지혜를 주소서.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게 해주소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도 그냥 내어주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대다수 군중의 의견에 반하더라도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은 용기를 주소서.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우선 기억하게 하소서.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4. 8. 08:51

말씀: 

1)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온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나 그를 칠 증거를 얻지 못했다. 거짓증거를 하되 성전을 헐고 3일동안 지으리라하는 말로 서로 논쟁을 벌였다. 

2) 침묵하시는 예수님, 결국에는 찬송받을 이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임을 선포하니,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조롱하였다.

3) 여종이 베드로에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알지 못한다고 세번을 부인하니 닭이 두번 울었다.

함께 있었다. -->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몰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그 도당이다 --> 부인함

참으로 그 도당이다. --> 저주하며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묵상: 

1) 예수님을 잡아오기는 했으나, 덮어씌울 적당한 죄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끼리도 설왕설래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세상에서 잘못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저것 많은 죄를 지고 잡혀왔다면 온갖 목록을 들이대며 고소하였을텐데, 잡아온 당사자들조차도 무슨 죄인지 몰라 헤매었으니, 예수님의 결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2) 예수님은 일일히 댓구하지 않으셨다. 대의를 중시하고 지금 십자가를 지어야만 하는 마당에 변호를 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표정은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여유였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을 꼬투리 잡아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모습으로 잡혀온 이 청년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높히니 바로 이거다라고 하면서 죽임을 당하게할 결정적인 죄목으로 정하게 된다. 

3) 베드로는 예수님이 받는 재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멀찍이 따라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불을쪼고 있었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세번씩이나 그 당이라고 다그쳤지만 끝끝내 아니라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달ㄲ이 두번 울고 말았다.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퍼뜩 떠오르면서 베드로의 정신이 확 들었을 것이다. 심문을 받으시면서 저 멀찌감치 앉아있던 베드로와 당신을 부인하며 여종에게 능욕당하는 제자의 모습과 닭울음소리. 베드로는 민망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적용: 

나는 세상에 대해 변명하는가? 때로는 예수님 믿는 일로 오해를 받고 다른 사람을 비난을 받아도 그것이 주를 위한 일이며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면 내가 받을 부끄러움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는가? 사람들이 하는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내 속사람을 정확히 아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을 바라보자. 주님은 내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손해보는 삶을 살자. 이것이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길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주님이 영광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말도 안되는 심문을 받으시면서 대의를 생각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단 한마의의 중요한 말만을 하셨다. 

베드로는 주의 수제자이나, 여전히 다혈질이고 연약한 존재였다. 그런 베드로의 모습이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은혜다. 나도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약삭빠르며 이타적이지 못하고 이중적이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세상에 빛을 비추기는 커녕 제 앞가름도 제대로 못하는 나이기에 더욱 소망을 가져본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며 저도 세번씩이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보다 훨씬 모자란 제자이니 주의 도우심을 구하자. 어찌 주님 도움없이 이 하루를 살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위기와 위험 속에서도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오늘 수술 가운데 함께 해주시고 장루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분을 위한 지혜를 구하자.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4. 7. 08:04

말씀: 

1)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보낸 무리와 함께 유다가 와서 입을 맞추는 분이 예수님이니 잡아 끌어가라고 함.

2) 그들이 예수님을 잡을 때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칼로 떨어뜨렸다. 예수님은 날마다 함께 성전에 머물렀는데 잡지아니하여놓고서는 이제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잡으러 온 이유가 무엇이냐하고 하시면서 성경을 이루신다고 하심.

3) 제자들은 벗은 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묵상: 

1)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팔아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는가? 하지만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니,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하다. 이 유다는 우리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악한 탐욕이 죄를 우리 안에 키우고 있다. 

2,3) 검과 몽치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의연하셨다. 평소 사역 때에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셨지만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다만 성경을 이루려고 이 모든 상황에 순응하셨다. 베드로의 급작스러운 행동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나나내준다. 그 딴에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수제자로서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 직후에 제자들이 모인 행동은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뿐이었다. 예수님이 잡히시게 되면서  민란을 일으키려는 자의 공범으로서 죄를 물을 것이 두려워 도망갔을 것이다. 바로 전에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놓고 이런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의 힘을 빌려 그 자리를 모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씀을 이루려고 순한 양같이 끝려가셨다. 불법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저항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고 비방하였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의연함에 놀라며 과연 이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적용:

예수님의 참 제자와 배반한 제자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이나 겉옷을 버려두고 알몸으로 모두 도망간 것이나 뭐가 다른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유다를 비방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충성된 제자의 모습은 허울에 불과하다. 우리 안에도 여전히 유다의 모습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 제자들의 모습이 연약한 나의 모습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가 어떻게 돌변할지 우리도 모른다. 자신도 놀랄 이런 모습에 다시 회개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고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님의 의연함을 배우자. 그분이 폭력에 대처하는 모습의 당위성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할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는 되겠는가? 가장 최악의 경우가 죽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죽은 이후의 삶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면 그들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의 악과 폭력에 대하여 말씀 안에 거하여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담대하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이시며 나를 돕고 계심을 잊지 말자. 예수님의 현명한 행동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다.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은 다만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