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020. 3. 23. 12:09

말씀:

1) 갈릴리로 지나가심. 이때 제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심. 제자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였다. 

2) 가버나움에 이르러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쟁론의 내용에 대해 물으셨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언쟁을 벌였고 이에 대해 주님은 어리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저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3) 귀신을 내어쫓는 자에 대해 따르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의탁해 사역했으니, 최소한 주님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해서는 안되며 과감하게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다. 

 

묵상: 

1) 예수님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시고 길을 재촉하셨다. 두번째 설명을 듣고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너무 두려워 무슨 뜻인지 묻지도 못하였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시고 그들이 준비하길 바라셨던 것 같다. 내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직 제자들에게는 선생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어린아이 같은 상태인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다는 엄청난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나의 복잡한 생각이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내것을 기꺼이 내어 버리고 주님 하시는 말씀을 이해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2) 누가 크냐고 제자들이 언쟁을 벌일 이유가 뭘까? 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도 서열을 매기기를 원했다. 누가 수제자이냐? 누가 이들의 리더이냐? 그런데 이 언쟁이 예수님 돌아가심에 대한 가르침 이후에 있었다는 것이 더 안타깝다. 예수님이 안계신 상황을 미리 떠올려보고 그 때에는 자신들이 어떻게 제자의 권리를 사람들 앞에서 나타낼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서로 다툴만도 하다. 공평하게 12제자를 부르셨는데, 서로 상호 존중하며 세워가는 리더십을 바라셨을텐데, 제자들은 스스로 줄을 세우고 서로 누가 위에 있냐고 싸우고 있었으니... 지금의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주인공을 하려하고 조연을 맡으려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 조용히 섬기는 아름다운 섬김의 공력을 따르려하지 않는다.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면 이에 대한 하늘나라의 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도 몰라도 주님은 알고 계실텐데, 왜 남들에게 알리기에 급급한가? 만약 주님이 안계시다면 당연히 자신의 일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게 맞을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 하늘의 상급으로 쌓이고 있음에 감사하고 변함없이 이웃을 섬겨야 할 것이다. 리더로 세우시는 주님의 결정권을 따르고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말자. 스스로 높인자는 그 자리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떨어지게 마련이다. 

3) 내가 정통인데, 저사람도 이런 걸 하네... 무시하고 싶고 나보다 하등하다고 여겨 그 공로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환자를 보다 보면 다른 병원에서 받은 치료에 대해 얼마나 엉터이였냐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우연은 없듯이 그것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자는 나를 위하는 자이니, 협력하고 세워주고 사람들 앞에 칭찬받게 해야한다. 

우리는 많은 유혹과 죄 가운데 빠져있다. 손, 발, 눈이 죄를 짓는 최전방에 있다. 그것들을 잘라버리고서라도 지옥가는 것보다는 영생을 얻는 편을 선택해야한다. 나는 여전히 과감하게 쳐낼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서 될일도 아니다. 다만 주님이 나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행하라 할 때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얼마나 간단한가?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듣지 않고, 들었어도 애써 못들은척하고 살고 있다. 

 

적용: 

말씀을 읽자, 이게 무슨 뜻인가하며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자. 지금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시대적 상황을 성경에 비추어 풀어보자. 분명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있을텐데,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여 깨닫지 못한 것을 밝히시리라. 성령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 중심에 분명하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남을 세워주는 일. 꼭 내가 주인공이 되려하기보다는 동료를 격려하고 세워주고 더 많은 기회를 주도록 하자. 서로 빼앗으려 하기보다는 서로 섬기려하고 나누려 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공동체가 되겠는가? 내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채워주신다. 요즘 환자가 부쩍 줄어서 한가한데, 이 와중에도 섬김일을 찾아보자. 

죄를 단칼에 끊어버리라. 게으름과 시간을 허투로 쓰는 것과 불경건한 마음의 생각들과 몸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들을 주를 향해 돌이키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리자.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좋은 길을 보여주시리라.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21. 10:35

말씀:

높은 산으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 옷이 광채가 나며 희어짐. 엘리야, 모세, 예수님 대화함. 베드로가 초막 셋(예수님, 모세, 엘리야)을 짓겠다고 함. 베드로는 횡설수설한 것임. 너무 무서워서. 구름속에서 나는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둘러보니 아무도 없더라..

내려오면서 본것을 부활때까지 이르지 말라고 하심.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함. 사람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겠다하고, 예수님은 이미 왔는데, 함부로 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심.

 

묵상: 

제자중에 일부만 데리고 가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높은 산에서 그들이 목격한 놀라운 광경은 두려움 속에 경외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비밀을 초자연적인 메시지로 들으니 나중에 예수님 부활 승천후 복음을 증거하는데 더 큰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선택된 제자들은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당황스러워 어리버리하게 있었을 터인데,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모든 고리가 풀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오셨는데, 메시야가 와야 한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왔다고 말씀하셔도 아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계신데, 우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그럴리 없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 구름속에서 난 소리를 기억하자. 하나님의 아드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기억하자. 33년의 짧은 삶이 전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음을 2000년 동안 온 세상에 증거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자. 혹자는 기독교 신앙은 그저 삶의 액서사리이며 사교모임에 불과하다고 여기곤 한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한다.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이지 이런 초자연적 하나님의 기사 이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이 있어도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껍데기뿐인 신자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적용: 

구름 속에서 나는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듣게 하소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친밀하게 기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특혜이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을 찾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에나 계신분이 되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로만 여기기도 한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대답하고 교감을 이루는 일이 가능하다. 한번 깊이 있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시도해보자. 

지금도 말씀하시고 세상의 다스리시며 모든 일들을 그분의 섭리아래 두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어려운 사태를 주셨는지 기도하자. 고통속에서 아우성치는 전 세계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실텐데, 11,311명이 넘게 세상을 떠나게 하면서까지 주시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들어보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에게 닥친 재앙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작품임을 잊지 말자. 

지금 어려움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을 이웃들을 기억하자. 전화하고 안부를 묻고 물질로 도울 일이 있는지 찾아보자. 작은 정성이 마음 문을 열게할 것이며,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주님께 돌아올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이미 생명있는 자는 사망에 이를 자에 대한 헌신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20. 08:21

말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하느냐고 물으심,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너희들은? 주는 그리스도 -->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시고, 죽임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심. 베드로는 항변함.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런 엄청난 말을 하셨다. 수제자에게.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1. 자기를 부인하고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심. 자기 목숨을 잃어야 구원을 받는다. 누구를 위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게 이 세상에는 없다. 살려면 똑바로 해라,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고, 

예수님도 그 사람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다시 올 때에 to be ashamed

 

묵상: 

비로소 가르치신 내용이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항변하였을 때 사탄이라고 부르시면서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대속죄물로서의 구속 사역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난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믿으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며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것이다. 날마다 내가 질 십자가는 얼마나 크고 어려운 것인가? 단 한번 죽으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통큰 결단과 용기를 우리가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오늘 하루도 여전히 죽는 연습을 해야 누르고 눌러야 그나마 쬐금 죽는 시늉정도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죽는 것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너무 적다. 우리가 믿는다 말은 하여도 여전히 제자답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은 이 십자가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살것이요, 그 십자가를 피하면 죽을 것이니 세상은 우리에게 왜 그런 생고생을 하느냐고 당장 내려오라고 우리를 설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된다. 고집스럽게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그 자리에 우리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 돌맹이가 날아오고 모욕을 당하더라도 굳굳하게 자리를 지키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책임지신다. 

 

적용: 

내가 오늘 받을 고난은 무엇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자. 

욕도 먹어보고 모욕을 당해보기도 하자. 주님을 믿는 일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주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시고 여전히 지켜보고 계신다. 주님 영광위해 살아가는 내 모습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실 것이다. 한 제자의 온전한 삶이 비록 미약해보일지라도 세상은 이 작은 날개짓에 변할 것이다. 지금도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뭇 영혼들의 구세주께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라.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