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020. 3. 29. 11:24

말씀: 

1)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계속해서 해를 입히고 죽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상속자인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하였다. 나중에 주인이 이 농부들에 대하여 진멸하고 포도원을 남에게 줄 것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대적하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을 향한 것이었고 그들이 이를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나 무리가 두려워 그냥 갔다. 

2)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 외식함을 아시고 왜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면서 데나리온 하나를 보시며 가이사의 형상이 있으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님께 바치라 하셨다. 

 

묵상:

1) 하나님의 포도원을 잠시 맡아 운영하는 농부들은 세상사람들과 같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따로 있다. 울타리를 두고 틀과 망대를 만들어 소출을 나게 다 만들어 놓고 운영을 맡긴 것이었다. 농부들은 욕심을 냈다. 그 소유자가 있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양 생각하고 당연히 바쳐야 할 소출의 일부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덕에 복음을 전하러 보낸 주의 사자들을 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는가? 주인은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그 마저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누리는 것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니다. 다만 포도원의 농부같이 세를 얻어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소출을 내다보니 그 일부라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깝게 생각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는 착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포도원에 일하게 해 주시고 고정적인 수입을 얻게 해 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되어 그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 주인이신 하나님과 농부인 사람들이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 때문이었다. 끝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이슬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만, 건축자의 버린 돌이 완성된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그 아들이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은 무엇인가? 동전은 로마에 세금으로 내고 각종 산물로 성전에 제물로 드리라는 말인가? 그당시 성전세도 이 동전으로 낸 것을 생각하면 똑같은 동전을 내되,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헌금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COVID-19로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하고 교회에서 드리는 회중 예배를 자제하기를 당부하였을 때 많은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강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우리는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모여 예배를 들리라고 하였으니, 하나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성남의 모교회가 집단 감염을 일으켰고, 그곳에 사는 주민 말에 의하면 교회 간판을 내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작금의 사태를 종교탄압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며 믿음으로 모인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믿음인가?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 삶을 돌아보아 그들이 진실로 세상의 모범을 보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초대교회의 카타콤의 신앙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웃과 부조화하며 이기적 종교단체였다면 개신교 교회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초해할 것이다. 그 교회에 그렇게 사람이 모여들어도 한 사람도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왜 모였냐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할 텐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집단 감염을 일으키니 전국의 모든 개신교 교단이 욕을 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박해에도 꿋꿋하게 공예배의 전통을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배의 공공성도 생각해야 한다. 예배가 칼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준다면 당연히 중단해야 한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 전역이 고통받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모이는 것을 삼가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1917년 스페인 독감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이 질병을 극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도리어 집단 발병이 되어 수많은 신도들이 죽어나갔던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신앙이 믿음이 아니라 무지함에서 나오는 미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용: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깊은 산속에서 산초를 뜯어 먹으며 근근하게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보면 도리어 부럽다. 현대인의 삶의 구조는 건강을 해치고 몸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게 만들어가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이 먹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비정상적인 것들로 인생이 즐거움을 찾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남들 보기에 부럽고 내세우려고 사는 것인가? 남들의 부러움을 사도 정작 당사자들은 많은 마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 많이 얻으려 하고 가진 것을 지켜려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태어날 때 부모가 가진 부를 누릴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쌓아두어도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몸에 금붙이를 두르고 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끝도 없는 욕심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가?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감사하자. 지금 가진 너무 많은 것들을 이웃과 나누자. 나는 관리하는 사람이지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28. 11:43

말씀: 

1)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을 목격함

2)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심. 우리도 허물이 많으니 기도할 때 남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심

3) 성전에 다시 나아가시니,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냐고 종교 지도자들이 따져 물음. 질문으로 응대하심.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인가? 땅에서부터 인가?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고, 예수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묵상: 

1)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거라면 예수님의 저주로 뿌리까지 말라죽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인가? 열매를 맺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야할 나무가 때가 이르기도 전에 오해(?)를 받아 죽어버렸으니 억울하기만 한 일인가? 그 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느꼈겠지만, 이것이 바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얼마나 깨달았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그 가운데 서려있는 주님의 메시지를 새겨듣도록 하자. 

2)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기도, 이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이것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말씀하시기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또 기도하는 것을 기도하는 순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해놓고서 속으로 설마 이루어지겠어. 기도니까 말은 했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 삶의 믿음대로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했다면 지금 당장 눈에는 안 보여도 이미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고 믿어야 한다. 한 환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미 난 나았어요'라고 외쳤지만, 결국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단서가 따라오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할 때 이루어진다. 내 욕심으로 내 희망사항을 아무리 기도 속에 표현해보아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위험하거나 유익하지 않은 일이라면 당연히 안 이뤄 주실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실 것이다. 
또 기도하는 가운데, 용서를 하라고 하셨다. 살다보면 미운 사람이 많다. 이유도 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고 늘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도 있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기뻐하듯이 나를 대하는 사람도 있다. 저주를 퍼붓고 무시하면 그만인가? 나도 주님 앞에선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남들에게 그런 존재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탓만 하게 된다. 기도할 때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듯이 나도 그들을 용서한다고 아뢰자. 주님께서 이 불편한 관계를 평화의 관계로 바꾸시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도록 하실 것이다. 사랑해야 복음도 전해진다.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저 인간을 사랑하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하신 과격한 행동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것인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이 뭔데 저렇게 난리야. 이 성전이 자기 것이라도 되나? 왜 잘하고 있는 장사를 못하게 하는 거야. 우리도 이 사람들이 더 잘 제사할 수 있도록 좋은 일하고 있는데...' 그 당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거래가 왕성하고 제자를 드린다는 율법을 행하기 위한 외식의 장소였던 것 같다. 분명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들도 어떤 형태로든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33살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난리를 치고 다닌다. 그러니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당당했다. 제가 너무 설쳐대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게요 이러지는 않으셨다. 도리어 요한에 대해 질문을 하시면서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를 묻자 그들은 그렇다 하면 그가 선지자인데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안 그렇다 하면 대중이 선지자로 여기는 요한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엄청나게 머리를 굴렸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예수님의 '나도 너희에게 말 못 하겠다'라는 말에 완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권세로 이 성전(하나님의 집)을 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들의 수준에 맞게 대처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더 꼬투리를 잡아 불경건 죄로 주님의 사역이 더 진행되지 않게 막아버렸을 것이다. 

 

적용: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지금의 COVID-19 사태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경제가 파탄나고 의료 자원이 부족해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수만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질병과 고통을 주시는 스케일인 전 세계적인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 누구도 이것이 우연이라 하지 않는다. 욕심을 채우려고 야생동물을 사고팔았거나 인류에게 위협이 될만한 병원체를 만들어 냈거나 뭐가 되었든 그 원천에는 인간의 죄가 도사리고 있다. 내가 그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고 근원지의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역병이 퍼져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걸맞게 땅을 치며 눈물로 회개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꼬인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갈 것이다. 우리가 왜 살고 있는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칠팔십 세가 되어 각종 질병으로 사망에 이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인생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얼마나 한시적인 존재인가? 나는 내가 영원한 존재임을 믿는다. 지금은 잠시 사는 세상일 뿐이다. 정말 잠깐 스쳐가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의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헤아릴 수 없는 영원의 시간 앞에 겸허하게 우리를 돌아보고 모든 욕심을 내어버리고 크게 바라보자. 

  • 주님, 온 세상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고 이런 저런 이유로 생명을 잃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 없게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엄숙한 경외감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이러할 때일수록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사망에 이르게 될 사람들에게 특별히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전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이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시간의 경계선에서 초접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더욱 힘을 더하여 주소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주님께서 뭇 영혼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펼쳐주소서. 

예수님의 위기대처 능력을 본받자. 누구를 깎아내리지도 비난하며 욕하지도 않으셨다. 한마디의 질문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입을 다물게 했으니 얼마나 통쾌한 승리인가? 어디 해볼 테면 해보자 하면서 경박하게 다투거나, 다 귀찮은데 그래 네가 옳다라면서 대충 넘어가서도 안된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타락한 세상인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 

  • 주님, 저는 지혜가 참 부족합니다. 그냥 마음이 속상하기만 하고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다만 내 눈앞에 안나타기만을 바라며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대면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때마다 성령께서 이 우둔한 입술에 하실 말씀을 넣어주셔서 둘 모두 윈윈하게 도와주소서. 미워하지 않았고 사랑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소겸
마가복음2020. 3. 27. 08:30

말씀: 

1)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제자둘을 미리 보내셔서 나귀 두마리를 끌고 오라 하신다. 사람들이 묻자 '주님이 쓰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겉옷,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성전을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가셨다. 

2) 때가 아니라 열매가 안열린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3) 성전에 들어가 강도의 소굴을 만든 매매하는자, 돈 바꾸는자, 비둘기 파는 자를 나무라시고, 물건을 가지고 성전에 못들어오게 하셨다. '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그의 교훈을 기이하게 여기는 무리들과는 달리 어떻게 하면 주님을 죽일까 꾀하였다. 

 

묵상: 

(a) 나귀 둘을 댓가 없이 끌고 온것, (b) 때가 아니라서 열매가 맺히지 않은 무화가 나무를 저주한 것, (c)유대인의 성전에 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

왜 예수님은 이런 행동들을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a)에 대해: 나귀의 주인과 미리 약속을 해두신 것이 아닐까? 아니면 선지적 관점으로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 왜 아무도 타지 않았던 나귀를 고집하셨나? 아마 사람이 타는 것에 대해 나귀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혹시 날뛰었을수도. 그리고 왜 어린 나귀였을까?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런가? 

예루살렘 입성을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말과 전차를 이끌고 웅장하고 호화롭게 하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았던 안장도 없이 겉옷을 덮어놓은 새끼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들어오셨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께서..그리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로마의 착취와 많은 세금, 부역, 헤롯왕의 통치 등 그 백성의 한이 풀리려나 하는 기대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격하게 환영한 것이다. 

(b) 겉으로 보면 시장해서 뭐 좀 먹으려 했는데, 열매가 없으니 기분이 나빠서 다시는 열매를 못 따먹을 것이라고 저추를 한 것 같지만, 사람들이 들을 때 마땅히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공급해야할 나무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였다. 예수님은 시청각 교육을 하곤 하셨다. 이제 심판이 임박했으니 그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c) 예수님의 이런 대담한 행동들이 과연 타당한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셨나? 등록된(?)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도 아니고 제사장 가문도 아니신데, 왜 이런 행동들을 하셨을까? 사람들은 무감각해있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이 그들의 생계였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얻기 위한 장사를 했으니 성전의 본래의 취지를 에수님께서 다시 알려주신 것이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벌어진 이 과격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한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해야만 그나마 조금 알아들을 정도이니, 예수님 행동이 거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말해서 될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용: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권세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모와 스펙이 나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결정된다. 

  • 주님, 제가 세상의 가치를 철저하게 버리고 사람들의 평가를 배설물로 여기고 다만 주님과 친밀한 사람이라는 것이 유일한 자랑이 되게 해주소서. 

성전안에서 장사를 하는 것, 처음에는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은 어떤가? 이 일을 통해서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가? 주님이 잠시 맡겨주신 일이라 생각하는가? 똑같은 직업인이라 하더라고 작은 예수가 되어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성전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 같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 

  • 주님, 이 어려운 시기에 다닐 직장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를 이곳에 오게 하신 것도 수십년을 준비해 이 직업을 갖게 하신 것도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어느날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 사무실을 뒤집어 엎을까 두렵습니다. 이곳도 거룩한 곳이니, 기도하고 예배하고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성전이 되게 인쳐주소서. 

내가 해야할 과격한 행동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목표는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셨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깨닫고 주님앞에 나오길 바라셨다. 주님께서 하신 행동이 사랑이라면 나의 과격한 행동도 사랑이어야만 한다. 꾸짖기 보다는 하나라도 주려고 노력하고 세워주려고 노력하자. 

  • 주님, 저에게 가족과 동료와 거주할 나라가 있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과격하게 해서라도 그들이 더 온전하여지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용기를 제게 주소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을만큼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제 목숨을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에 정의가 하수같이 쏟아지는 역사를 위해 헌신할 마음을 주소서. 저는 아직 약한 어린아이와 같으나, 그 담대함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소겸